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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매/2006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가 소개 (유관순과 김구)

by 민영미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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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3.1운동하면 생각나는 열사가 있다. 바로 유관순 열사이다.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을 중심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났다.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유관순은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에도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 되었으며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2019년 2월 27일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가 영화로 개봉한다.

영화를 보며 유관순 열사의 용기와 애국심을 배워가면 좋겠다.

 

백범 김 구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인 해 이기도 하지만 중국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이 100주년인 해이기도 하다.

임시 정부하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백범 김구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100년 전 부터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하고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윤봉길 이봉창 등)을 조직하고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 이봉창 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는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할 즘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시안과 안후이성 푸양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 (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백범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돈에 맞쳐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2017년 10월 19일 백범 김구가 젊었을 때 이야기에 대한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를 보며 뜻깊은 3.1절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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